한량무는 순수한 무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용극에 속하는 것으로 남사당패에 의해 처음 연희되었다고 여겨진다. 유래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조선 후기에 생긴 사당패에 의해 연극으로 행해졌고, 고종(재위 1863∼1907) 때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말엽에 유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근대 전통춤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한성준이 무용극 형태의 한량무를 추었던 것이 제자 강선영의 증언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재인의 맥을 이어온 이동안 등도 무용극적 한량무를 즐겨 추었다는 점에서 한량무의 역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한량무는 민속 가면극 중에 노장(老丈)과 소무(小巫) 마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인 궁중무와 달리 민속적 특색인 계급사회의 시대상을 날카롭게 풍자하였다. 주로 무동에 의해 구한말까지 전승되었고, 1910년 이후부터는 무동이 아닌 어른들의 춤으로 변하여 기방에서 성행하였다.
현재 한량무는 두 가지 형태가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어 춤과 연기가 혼합된 무용극 형식의
춤과 독무로서의 한량무이다. 무용극 형식의 한량무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진주한량무가 대표적이며, 독무로서의 한량무는 무용극적
한량무에서 점차 약식화하여 소략된 것이다. 독무형태의 한량무는 예전 동래지역에서 한량들이 추던 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이매방류 승무
이수자 1호인 김진홍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한량이란 벼슬에 오르지 못한 양반을 일컫는 말로 풍류를 알고 의기있는 사나이를 부르는 말이기도
한데, 한량들이 놀이판을 펼쳐 즐길 때 추었던 춤을 이름하여 한량무라 한다.
무용극 형태의 한량무의 내용은 한량과 별감이 기생을 데리고 즐겁게 노는 자리에 승려가 나타나 이 광경을 보고 기생에게 반하여 멋진 춤으로 기생의 환심을 사서 기생이 마침내 한량과 별감을 배반하고 승려에게로 간다는 것으로 타락한 선비, 파계한 중, 정조 없는 색시, 게으른 관리 등을 응징하는 조선시대의 퇴폐성을 풍자하고 있다.
이 춤에는 악사와 한량, 승려, 기생, 주모, 별감, 상좌, 마당쇠 등이 등장하는데, 배역에 따라 성격이 다른 춤사위와 옷차림으로 구성된다. 한량의 경우 도포에 정자관을 쓰고, 별감은 궁중별관복을 입으며, 기생은 궁중 기생옷으로 몽두리에 색한삼을 끼고 족두리를 쓴다. 승려는 승복에 가사를 매고 작은 방갓을 쓴다. 춤장단은 주로 삼현육각의 연주로 중머리, 타령, 굿거리, 자진모리 등의 가락을 사용한다.
한량무는 우리나라 가면극 중 기녀계에서 연희되던 최초의 극형식 춤으로 역동성, 남성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남성춤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궁중계의 춤도 아니고 순수한 민속춤도 아닌 교방계류의 무용극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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