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의 이해

[스크랩] [국악의 역사 Part 2] 고구려의 음악

우리음악 2009. 4. 28. 15:57

 

 

 

 

국악의 역사 Part 2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가졌다. 여러 나라와 전쟁을 치뤘고 중국과 교역하며 국제성을 띠어 문화 예술의 수준이 높았다.
  고구려(B.C. 37년∼A.D. 668년) 음악은 그 전개 과정에 따라 3기로 나눈다.

 

제 1기 (B.C. 1세기 ~ A.D. 4세기)
제 2기 (A.D. 4세기 ~ A.D. 6세기)
제 3기 (A.D. 6세기 ~ A.D. 7세기)  
 

  

제 1기 (B.C. 1세기 ~ A.D. 4세기)

 

  고구려가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이며 여러 문헌과 안악 제3호분의 주악도나 통구의 무용총 등과 같은 고분의 흔적을 통해 당대의 국악에 대해 접할 수 있다. 그 당시에 기악, 성악, 춤이 종합 예술체에서 분리됐고, 중국 한(韓)나라의 음악이 들어와 고구려의 초기부터 음악 문화가 풍요로웠다.

 

 

1. 거문고와 완함
  4세기경 중국 진나라에서 7현금이 들어왔고 왕산악이 이를 개조해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거문고를 탄생시켰다. 왕산악은 거문고 곡 100여 곡을 작곡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완함은 월금이라고도 하며 안악고분과 통구 무용총의 벽화에서 가무 반주에 쓰이는 악기로 그려졌다.


2. 황조가와 가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직접 황조가를 지었다고 추정된다. 고대가요 중 순수개인서정시로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이다. 황조가 외에 공후인의 가사가 전해져 오며, 내원성 연양 명주 등의 가요가 불려졌다.


3. 한나라 음악 유입

  고분벽화에 중국 한(漢)나라 음악이 유입됐음이 나타난다. 안악 제3호분의 벽화에 10여종의 악기와 연주그림, 춤추는 그림은 다음과 같다.

 

   *전실의 연주그림 : 소(簫), 북(鼓, 立鼓) 과 노래
   *후실의 춤추는 그림 : 거문고(?) 완함 장소(長簫)와 춤
   *회랑의 행진하는 그림 : 담고 담종 이중고(二重鼓) 소 각(角) 요

 

  전실의 연주 그림에서  한나라 때의 궁중 뜰에서 연주하던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같은 양상을 띠는 고구려의 고취편성을 보여주며, 후실의 춤추는 그림에서 잔치할 때 연주되는 음악을 알 수 있다. 회랑의 행진하는 그림은 행진 음악의 하나인 단소요가를 그린 것으로, 이 벽화에 나타난 그림을 통해 4세기 이전에 중국 한나라의 음악이 고구려에 들어와 연주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제1기의 음악은 민간음악과 궁중음악으로 그 특색을 나눌 수 있다. 독주와 춤 반주 악기로 사용되는 거문고와, 춤 반주 악기로 주로 쓰이는 완함으로 민간 음악을 연주했다. 완함은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고구려의 민중에게 널리 쓰여 고구려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고구려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음악은 한나라의 음악을 도입한 것으로 연주했고 한나라의 의식과 음악에 영향을 받은 체제로 이뤄졌다. 궁중뜰에서 연주한 전정악(殿庭樂)과 왕의 행차, 군대의 행진 등의 의식 음악이 한나라의 음악을 빌려 썼지만 그 만큼 고구려의 음악이 융성했음을 시사한다.

 

 

제 2기 (A.D. 4세기 ~ A.D. 6세기)

 

  고구려는 백제를 함락시키고 북부 지방까지 진출하여 영토를 넓혔다. 국권이 강력해지면서 중국 대륙을 비롯한 서역 지방과 교역을 활발히 했고 음악도 더불어 들어왔다.

 

 

1. 악기

  제 1기에 쓰인 악기를 쭉 사용해 음악을 연주했다. 특히 각과 완함, 거문고는 다양한 음악에 이용되었다.

 

2. 서역악의 유입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 불교가 비단길을 통해 서역과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 들어왔다. 그 후 5세기경에 서역 음악이 고구려에 들어왔다. 장천1호 고분벽화에 고구려 악기와 서역 악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관악기 : 횡적, 대각, 장소, 피리

   * 현악기 : 거문고, 오현, 완함, 오현금

 

3. 춤과 놀이

  무용총은 거문고, 대각을 연주하는 그림이 있으며, 각저총에는 소와 북의 그림과 함께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평양 부근의 여러 고분에는 놀이하는 모습들이 많이 그려져 있으며 더불어 놀이할 때 벌어지는 음악 연주의 모습도 드러났다.

  악기가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면 음악도 함께 들어오지만,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음악의 조예가 깊은 서역과 교류하면서 필시 악기뿐만 아니라 음악도 전해졌으리라고 예상된다. 그리고 이 시기는 고구려 고유의 음악 위에 중국, 서역 지방의 악기와 음악을 받아들여 고구려 음악이 꽃피게 되는 시기이다.

 

 

제 3기 (A.D. 6세기 ~ A.D. 7세기)

 

  주변 국가들 중 권력의 우위를 차지한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의 침입을 받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을 하다가 나라를 잃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음악을 발전시켜 고구려만의 음악 특색을 띠게 됐고 다양한 음악 문화를 흡수했기에 해외로 나가 연주할 만큼 훌륭한 수준이었다.

 

1. 고구려 음악의 악기

  고구려 벽화에는 완함, 각, 금, 소, 횡적, 요고가 그려져 있고, 중국의 기록에는 오현, 금, 쟁, 피리, 횡취, 소, 고(북)가 고구려 악기로 쓰여있다. 고구려 음악에 사용된 악기는 각, 금, 소, 횡적, 요고, 오현, 쟁, 피리, 북들인데 이 중에는 해외로부터 수입된 새로운 악기도 있다.

 

  * 기존의 악기 - 완함, 각, 금(거문고), 소, 횡적, 오현, 피리, 북

  * 새로운 악기 - 요고, 쟁

 

  요고는 장구와 같이 허리가 잘룩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치는 타악기이며 서역에서 들어왔고, 쟁은 중국의 악기이다.

 

2. 공후인과 가요

  악기는 기악으로 연주하기도 하지만 춤 반주와 노래 반주로도 사용된다. 민간에서 많은 노래가 있었을 터임에도 공후인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후인은 언제부터 부르게 되었는지 그 연대를 알지 못한다.

 

3. 고구려 음악의 해외 진출

  고구려는 5세기 후반 중국의 위(魏)나라에 음악을 수출하기 시작한 후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도 음악을 보냈다. 위나라에 수출한 음악은 수나라와 당나라에 보낸 음악보다 규모는 작았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그들의 궁중에서 여러 나라의 음악을 항상 연주하도록 음악인들을 상주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수나라 개황(開皇: 581년~600년)초에 7부기를 선정하여 궁중에서 연주하였으며 이 중의 하나가 고구려 음악이다.

 

  수나라 대업(大業: 605년~617년) 중에 7부기를 확대하여 9부기를 제정하였다.

   * 9부기에 편성된 고구려 악기

      관악기 - 적, 생, 소, 소피리, 도피피리(복숭아껍질로 만든 피리), 패(조개: 취주악기)

      현악기 - 탄쟁, 와공후, 수공후, 비파(당비파를 말함), 오현(후에 향비파라 부름)

      타악기 - 요고(허리가 잘룩한 구형 악기), 제고, 담고, 용두고, 철판

 

 9부기 중의 고구려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는 모두 14종류이다.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는 7세기 초 정관(貞觀: 627년~649년) 중에 10부기를 제정하였다.

   * 10부기에 편성된 고구려 악기

     관악기 - 의취적, 생, 호로생, 소, 소피리, 도피피리, 대피리, 패

     현악기 - 탄쟁, 추쟁, 봉수공후(공후 끝에 봉의 머리를 장식한 것), 와공후, 수공후, 비파, 오현

     타악기 - 요고, 제고, 담고, 용두고, 철판

 10부기 중의 고구려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는 20종류이다.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나라와 지역들이 있었으나 7부기나 9부기 10부기에 제정되지 못한 것은 그 음악들이 궁중에서 연주할 만큼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의 음악도 잡기(雜伎)로 취급되었음을 비추어 볼 때 고구려 음악이 중국과 견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악기의 수가 많다는 것은 음악도 다양하다는 뜻이다. 음악이 어떤 것이었는지, 악곡 수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악기의 수가 많은 것은, 고구려에서 만든 악기와 중국 서역에서 들여온 악기를 모두 포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나라와 당나라 궁중에서 고구려 음악으로 지정하였던 그 이유는 고구려에서 사용한 모든 악기들이 고구려화되어 다른 지역의 음악과 구별되어 고구려 음악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보다 일찍 중국 및 서역과 교통하고 문물을 교역한 나라로서 음악이 고대 한반도의 어느 나라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중국과 서역에서 들여온 음악과 악기, 춤, 놀이들을 고구려화시켜 이전의 고구려 음악과 합쳐서 고구려 사람들에게 맞는 매우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고 또 이러한 음악을 중국에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음악 연주와 춤, 놀이는 궁중에서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성행했었는데 기록이나 벽화에는 보이지 않으나 노래도 많이 불렀을 것이고 또 고구려는 부여, 동예를 통합하였으므로 영고, 동맹, 무천과 같은 집단적 제천 의식과 음악, 춤, 놀이도 풍습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 제 1기가 음악이 뿌리내리고 싹이 돋은 시기라 하면, 제 2기는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 시기이고, 제 3기는 열매 맺어 씨를 뿌린 시기라고 하겠다.

 

 

 

 

[출처 : 풍류마을 http://www.kmusic.org/main.ph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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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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