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의 이해

잡가(雜歌)의 전승

우리음악 2006. 5. 23. 20:24

 서울지방의 전문 소리꾼들이 부르던 잡가에는 12잡가라 불리는 긴 잡가와 빠르게 해학적인 내용을 엮어 부르는 휘모리 잡가가 있다. 12잡가에는 <유산가>, <적벽가>, <평양가>, <달거리> 등이 있으며, 휘모리잡가에는 <바위타령>, <만학천봉>, <곰보타령>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으로 구성된 선소리 산타령이 이들에 의하여 불려졌다. 잡가를 잘 불렀던 ‘사계(四契)축 소리꾼’과 선소리를 잘하는 ‘오강(五江)의 소리꾼’들이 이들 잡가의 주된 공연층이었는데, 사계축은 만리재에서 청파동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 곳에는 상공인(商工人)들이 주로 살았는데, 추교신(秋敎信), 조기준(曺基俊), 박춘경(朴春景)이 대표적인 명창이고, 그 제자인 박춘재(朴春載), 최경식(崔景植), 주수봉 등은 20세기 전반기에 크게 활약하였다.

 

 용산·마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오강 소리꾼’ 중에는 의택이, 종대의 이름이 전하는데, 고종 무렵에 활약한 명창들이다. 이 밖에도 서울근교의 뚝섬패, 한강패, 쇠봉구패, 용산 삼개패, 동막패, 호조다리패, 과천 방아다리패 등의 선소리꾼이 활동하였다. 잡가꾼 박춘재(朴春載)와 최경식(崔景植)도 선소리를 잘했다고 한다.

 

 이후 박춘재 문하의 이명길, 엄태영, 김태운, 최정식 등이 잡가와 선소리의 맥을 이었으며, 방아다리패의 소완준, 왕십리패의 이명길 문하에서 이창배, 정득만이 나와 오늘날의 선소리 산타령을 잇고 있다.

 

 한일합방 이후 예기조합은 권번(券番)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한성권번, 조선권번, 한남권번 등이 있었다. 권번의 예기들은 본래 가곡, 가사만 배웠으나, 잡가를 선호하던 당시의 사회 풍조에 따라 잡가를 배워 부르게 되었다. 당시 한성권번에서는 장계춘(張桂春)이 가곡, 가사를, 유개동(柳開東)이 잡가를 가르쳤고, 조선권번에서는 하규일(河圭一)이 가곡, 가사를, 최정식(崔貞植)이 잡가를 맡았다. 이들에게서 가곡, 가사, 잡가를 배운 예기들은 각종 연회에서의 공연 이외에, 공개무대에서의 연주와 유성기음반 취입, 방송출연 등을 통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한편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도명창들도 1900년 이후 서울에서의 활동이 활발하여졌다. 평양 ‘날탕패’는 서울의 산타령을 토대로 서도산타령을 만들었고, 허득선(許得善), 문영수(文泳洙), 이정화(李正華), 김종조(金宗朝), 최순경(崔順經), 김칠성(金七星), 김주호(金周鎬) 등의 남자 명창과 김밀화주, 장학선, 최섬홍, 이진봉, 손진홍, 백모란, 길진홍 등의 평양 예기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연, 음반취입, 방송활동을 펼쳤다.

 

 경·서도 명창들의 연주곡목은 경기잡가와 서도잡가를 넘나들었으며, 이들은 당시에 새로이 만들어진 통속민요와 신민요를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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