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의 이해

[스크랩] [국악의 역사 Part 5] 통일신라의 음악

우리음악 2009. 4. 28. 15:58

 

 

 

 

국악의 역사 Part 5

 

 

 

 

 

                                            통일신라의 음악                                               

 

 

 


  가야국의 가야금, 고구려의 거문고, 서역 악기였던 오현이 고구려에 수용된 이후 향악기로 취급된 향비파, 이상 세가지 현악기가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현악기인 삼현(三絃)으로 뚜렷이 뿌리를 내리고, 대금·중금·소금이 통일신라 향악의 대표적인 삼죽(三竹)으로 등장함으로써 특히 기악 발전이 이루어졌던 시기가 바로 통일 신라 시대이다. 전제 왕권의 성립에 따른 관계의 하나로 설립됐던 왕립 음악기관인 음성서의 성장·발전이 통일 신라 시대의 향악 발전에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3현 3죽과 음악

  3현 3죽은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을 말한다. 3현중에서 가야금은 통일 이전과 같이 기악 형태로 연주되었고 또 노래와 춤에 편성되어 연주되었다.

 

 문무왕 8년(668년) 신라가 통일되었는데, 거문고는 이 당시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것 같다. 그 뒤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고, 신기(神器)로 간주되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되어 오다가 9세기경부터 일반인들이 연주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 하였다.

 

  [삼국사기]에 거문고가 들어온 이후 악기로 사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사찬 벼슬을 가진 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서 50년간 거문고를 익혀 스스로 30곡을 작곡하여 이를 속명득에게 전하였는데, 속명득은 다시 귀금선생에게 전하였고, 귀금선생은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단절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찬 벼슬의 윤홍으로 하여금 그 음악을 전수받기 위해 남원 공사로 임명하였다. 윤홍이 부임하여 안장과 청장 등 총명한 두 소년을 뽑아 지리산에서 거문고 음악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귀금선생은 그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으나, 비곡(秘曲)은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홍은 부인과 함께 귀금선생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에 파견한 것은 선생의 음악을 전수받게 하고자 함인데 3년이 지나도 비곡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내가 왕에게 무엇이라 말하리이까' 하고 부인과 더불어 모든 예의를 갖추니 비로소 표풍(飄風)등 3곡을 전수하였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그 음악을 가르쳤고 극종이 7곡을 작곡했는데, 극종 이후로는 거문고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당시 거문고 곡은 187곡이 연주되었고, 평조(平調)와 우조(羽調)로 되어 있으며, 옥보고가 작곡한 거문고 곡 30곡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상원곡(上院曲) 1                 중원곡(中院曲) 1            하원곡(下院曲) 1 
            남해곡(南海曲) 2                 기암곡 1                        노인곡(老人曲) 7 
            죽암곡(竹庵曲) 2                 현합곡(玄合曲) 1            춘조곡(春朝曲) 1 
            추석곡(秋夕曲) 1                 오사식곡(五沙息曲) 1      원앙곡(鴛鴦曲) 1 
            원호곡(遠岵曲) 6                 비목곡(比目曲) 1            입실상곡(入實相曲) 1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1    강천성곡(降天聲曲) 1  
 

  3현 중 향비파는 서역 지방에서 고구려로 들어온 오현이 신라에서 당비파와 구별하기 위해 향비파라고 불렀다. 당비파는 4줄에 손짚는 지판 위가 구부러졌으나 향비파는 5줄에 지판이 곧게 뻗어 있는 점이 다르다. 향비파 곡은 모두 212곡이 있었고, 궁조, 칠현조, 봉황조를 사용하였다.

 

   3죽은 대금, 중금, 소금을 말하는데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신화적인 유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문왕 때 동해중에 홀연히 산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모양이 거북이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하니, 왕이 이것을 꺾어 적(笛)을 만들고 만파식(萬波息)이라 이름했다." 또한 이 악기를 거문고와 함께 천존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이 악기를 불면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이 평정해진다고 하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3죽은 고구려에서 전해온 듯 하다. 소금은 298곡, 중금은 245곡, 대금은 324곡이 있었으며, 각각 평조, 황종조, 이아조, 월조, 반섭조, 출조, 준조의 7조로 되어 있다. 간인과 날인현이 3현 3죽 편성으로 노래하였는데, 악(樂), 가(歌), 무(舞)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으므로 3현 3죽은 여러 형태로 연주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당나라에서 들어온 박(拍)과 대고(大鼓: 큰북)가 사용되었다.

 


향 가

 

  * 무열왕(654년 ~ 661년) 때 양산가(陽山歌)
  * 문무왕(661년 ~ 681년) 때 원왕생가(願往生歌)
  * 효소왕(692년 ~ 702년) 때 모죽지랑가(摹竹旨郞歌)
  * 성덕왕(702년 ~ 737년) 때 헌화가(獻花歌)
  * 효성왕(737년 ~ 742년) 때 원가(怨歌)
  * 경덕왕(742년 ~ 765년) 때 도솔가. 산화가(散花歌)
  * 원성왕(785년 ~ 798년) 때 우적가(遇賊歌).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 홍덕왕(826년 ~ 836년) 때 앵무가(鸚鵡歌)
  * 경문왕(861년 ~ 875년) 때 현금포곡(玄琴抱曲)
  * 헌강왕(875년 ~ 886년) 때 처용가(處容歌)
  * 경애왕(924년 ~ 927년) 때 번화곡(繁花曲)
  * 경문왕(927년 ~ 935년) 때 망국애가(亡國哀歌)

 

  이밖에도 원효대사가 지은 무애가, 월명사의 제망매가, 충담사의 안민가, 찬기파랑가와 희명이라는 여인이 지은 도천수관음가 등이 있다.

 

춤과 연희  

  하신열무(下辛熱舞), 사내무(思內舞), 상신열무(上辛熱舞), 소경무(小京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등이 있었으며, 하신열무 등 4편의 춤은 가야고와 노래 춤의 종합예술이었고, 한기무 등 세 편은 가야고 편성의 춤이었다. 이밖에 화랑 관창의 가면을 쓰고 춘 검무와 원효대사가 파계하여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춘 무애무가 있다.

 

  팔관회가 열였는데 하늘과 명산, 큰 강이나 용신 등 토속신에게 제사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 행복을 기원하며, 화랑에 의해 노래와 춤 놀이를 하였다. 흔히 제사는 11월에 거행하고 이 날에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다.

 

  학자 최치원(837년 ~ 876년)이 쓴 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향악잡영 5수]로서 이 시를 통해 다섯가지 놀음과 이에 따르는 음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가지 놀음은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인데, 금환은 백제의 농주(弄珠)와 우륵의 12곡 중 보기와 유사한 공놀이 또는 오자미의 일종이고, 월전은 재담, 대면은 탈춤, 속독은 춤, 그리고 산예는 우륵의 12곡 중 사자기와 같은 사자춤이다. 또 금환, 대면은 중국계통의 놀이이고, 월전, 속독, 산예는 서역 계통의 놀이지만 음악은 알 수 없다.

  최치원의 시는 서역악이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헌강왕 11년(885년) 이후에 시를 썼고 향악이라고 말한 점에서 중국 음악과 서역악이 9세기말에 향악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음악 범패

  불교 음악은 절에서 재를 올릴때 부르는 범패(梵唄)와 포교를 위해 우리말로된 화청(和請)과 회심곡(回心曲)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년) 국선(國仙)에 속한 월명사가 "향가는 알지만 범패는 부를 줄 모른다."는 기록에서 8세기 중엽 범패가 신라에서 가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과는 달리 원효대사가 무애가를 부르며 춤을 춘 것은 포교를 위한 거사(居士) 소리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범패의 기록은 옥천사에 세운 진감선사(眞鑒禪師)의 [대공탑비문]에 범패의 오묘함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처음이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27년만인 홍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옥천사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으므로 범패는 늦어도 9세기 신라 사찰에서 널리 가창되었을 것이다. 당시 적산원(赤山院)에는 대중이 석가를 칭송하는 회중가의 신라풍과 당나라에서 부르던 당풍, 그리고 당나라의 범패보다 더 오랜 고풍의 세 범패가 있었는데, 신라의 범패는 신라풍과 고풍의 두 양식의 음악이 가창되었다고 본다. 범패 자료는 [동음집](同音集)과 1931년 출간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이 있다.

 

 

당악이 들어옴 

  문무왕 4년(664년) "성천(星川)과 구일(丘日)등 28명이 부성에 가서 당악을배웠다." 고 한다. 신라가 통일한 것은 668년이고 부성에 당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점으로 보아 이때 배운 당악은 고취(궁중 의식이나 군대 행진에 연주되는 일종의 취주악) 형식의 음악일 것이다.

 

  삼현삼죽 음악에 사용된 궁조, 월조, 반섭조 등 당악의 조이름을 사용하고 여러 유적에서 나타난 악기들을 보면 당악이 많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고, 요고, 횡적, 당비파와 퉁소, 쟁, 소, 생, 당피리, 적(笛), 박판, 공후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음성서 설치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가 팽창됨에 따라 신라의 궁정은 의식을 제정하여 집행하게 되고, 의식에는 음악 연주를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궁중의 의식 음악은 예고됨이 없이 항상 열리는 것도 있으므로 음악인을 궁중에 상주시켜 연주, 행정, 교육을 담당할 음악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그 래서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音聲署)를 설치했다. 음성서가 설치된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해보면 진덕왕 5년(651년)에 대사 2명을 임명한 것으로 보아 늦어도 진덕여왕 이전 7세기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명칭은 경덕왕 때 대악감(大樂監)으로 개칭되었으나, 혜공왕 때 다시 음성서로 바뀌었다. 

  관원은 장(長) 2명, 대사 2명, 사(史) 4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신라 골품제도에서 4~6두품에 속하는 귀족출신으로 연주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하는 일과 악공(樂工)들의 교육을 맡았다. 음성서의 악공들은 모두 척(尺)이라 불렸다. 즉 가야금의 연주자는 금척(琴尺), 관악기의 일종인 가(茄)의 연주자는 가척, 성악을 담당하는 악공은 가척(歌尺) 등으로 구분되었다. 복식은 무공(舞工)은 푸른색 옷을 입었고, 악공들은 붉은색 옷을 입었으며, 가척은 채색된 옷을 입고서 수놓은 부채를 들었으며, 이들은 모두 금실로 꾸민 띠를 둘렀다. 

 

   음성서와 관직의 내용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왕 대 연 대 소 속 명 칭 관           직
제28대 진덕여왕 5년
(651년)
예 부 음성서 장(長) 2명 대사(大舍) 2명 사(史) 4명
제31대 신문왕 7년
(687년)
예 부 음성서 경(卿) 2명 대사 2명 사 4명
제35대 경덕왕
(742년~765년)
예 부 대악감
(大樂監)

개정:
사악(司樂) 2명
주서(主書)
개정:대사2명
사 4명
제36대 혜공왕
(765년~780년)
예 부 음성서 개정: 경 2명 대사 2명 사 4명

 


 

삼국의 무속 

  환웅천왕이 내려온 신단수 부근은 신역 또는 재단으로서 이 주위를 신시(神市)라고 하였다. 단군은 이 천왕의 아들이라 하여 천왕을 제사하고 모시던 고조선의 제주(祭主)이며 군장(君長)이었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신정시대 즉 제정일치 시대의 모든 군장이 제주를 겸하였다. 따라서 이 때 백성들은 제주인 무당을 통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는데, 신라는 왕호를 차차웅(次次雄) 즉 무당이라는 호칭을 가졌으며 고구려는 사무(師巫), 마한의 천군(天君)은 모두 제정이 하나로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호칭이었다.

 

  가야국의 계락(稽洛),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백제의 소도 등은 단군신교의 유풍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졌으며 유(儒) 불(佛) 선(仙)이 들어옴으로써 고유한 무속이 변형되었다. 즉 유교의 길흉의 예의와 불교의 분수(焚修)의 법, 도교의 초제의 의식 등과 혼합된 무속이 되었다.

 

  굿 또는 제사의 주제(主祭)를 무(巫)라 하였는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신을 내리게 하고 기도로써 재앙을 피하여 축복을 내리게 하였다. 여무를 무당 또는 만신이라 하고 남무를 박수 또는 복사라 한다.

  고구려는 10월에 하늘에 제사했다는 부여신과 그 아들인 고등신(高登神)을 모신 신묘가 있고 신수라는 큰 구멍에 왕이 직접 제사했다. 고구려 초기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하는데 이 때부터 제정이 분리되었다. [삼국사기]에 무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제 2대 유리왕 19년 8월에 돼지를 놓쳐 버렸으므로 왕은 탁리와 사비로 하여금 이를 쫓아가 잡아오게 하였는데, 장옥못가에서 이를 잡아 칼로 돼지의 다리를 끊으니 왕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제천의 희생물을 어찌 상할 수 있느냐' 하고 도리어 탁리와 사비를 구덩이에 던져 이들을 죽였다. 9월에 왕이 병들었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이는 탁리와 사비가 저주하는 까닭'이라 말하므로 왕은 사람을 보내 이를 사과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무당들이 병을 치료하고 액운을 물리치며 예언하고 신접(神接)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사중(四仲)의 달에 왕이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하고, 시조 구태묘를 세워 해마다 네 번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일관 즉 무당의 낱말이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 25년 2월에 왕궁의 우물이 크게 넘쳤다. 이 때 한성 사람의 집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이고 몸이 둘이었다. 이에 일관이 말하기를 '우물이 크게 넘치는 것은 대왕이 흥왕하게 일어날 징조이고, 소의 머리가 하나이고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인접한 나라를 평정할 징조'라고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드디어 마한과 진한을 병합할 뜻을 갖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건국초까지 제정이 분리되지 않았다. 신라인은 차차웅으로 항상 귀신에게 제사하였기 때문에 차차웅을 경외하였으며 드디어 군장을 차차웅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차차웅이고, 제2대 남해왕도 차차웅으로서 박혁거세묘를 세워 제사하였고 사직단을 세우고 명산대천에 제사하였다. 또 선농제, 중농제, 후농제, 풍백제, 우사제와 영성제 등을 지냈다.

 

  삼국의 무속은 무당이 주제자(主祭者)로서, 의무(醫巫)로서, 예언자의 직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 고대 삼국의 원시 종교에는 신을 숭상하고 존경하는 신도적 신앙과 악령을 숭배하며 제사하는 샤만적 술법같은 신앙이 혼합되어있다. 따라서 남무(男巫)는 박사(搏士), 박수, 화랑, 낭중, 양중이라 일컬었으며 화랑은 결국 광대(廣大), 창우(倡優), 우인(優人), 재인(才人)으로 후세에 계승되고 있다.

 

  이들의 굿노래가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현재 제주도의 본향풀이나 서울 바리 공주의 가사는 고대 서사시의 계통을 이은 무사 가요로서 고대에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일본에 전한 삼국의 음악  

  일본의 역사서는 한국 고대 삼국의 음악을 고려악(고구려 음악), 백제악, 신라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음악이 일본에 전한 것이 684년(천무천왕 1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가 패망한 것이 668년이므로 아마도 고구려 패망 이전인 6세기 또는 7세기초에 고구려 음악이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다.

 

  백제는 554년에 일본에 이미 파견된 백제 음악인 시덕의 지위에 있는 삼근(三斤), 계덕의 기마차와 진노, 대덕의 진타 등 네 사람의 청에 의하여 본국의 음악인과 교대한 사실이 있다. 이렇게 볼때 백제는 6세기 전부터 백제 음악을 일본에 전했을 것이다. 또 백제는 중국 남조의 음악과 관계하였으므로 6세기초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무를 미마지가 일본에 전했다.

 

  [일본서기]는 신라음악을 처음 기록하고 있다.

  "윤공 42년(453년, 신라 눌지왕 37년) 정월 을해삭 무자에 천왕이 붕(崩)하였는데, 그때 나이 약관이다. 이에 신라왕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調船) 80수와 종종(種種) 악인 80을 보냈다."

여러 종류의 악기와 무용 등을 공연 할 수 있는 음악인을 보냈다는 기록이 다. 이후로 일본에 전한 3국의 음악은 다음과 같다.

 

  * 대보(大寶, 701년 ~ 703년)의 아악료(雅樂寮)

  * 악사와 악생
    당악사 12명, 악생 60명
    고려악사 4명, 악생 20명
    백제악사 4명, 악생 20명
    신라악사 4명, 악생 20명

  * 731년(천평 3년)의 아악료
    대당악 39명
    백제악 26명
    고려악 8명
    신라악 4명

  * 809년(대동 4년)의 아악료의 악사
    당악사 12명, 횡적사 2명
    고려악사 4명, 횡적. 군후. 막목. 무(舞)
    백제악사 4명, 횡적. 군후. 막목. 무
    신라악사 2명, 금(琴), 무

  * 848년(가상원년)의 악생

        백제악생 20명, 감(減) 13명, 정(定) 7명
        횡적생 1명
        군후생 1명
        막모생(莫牟生) 1명

        고려악생 20명, 감 2명, 정 18명
        횡적생 4명
        군후생 3명
        막모생 2명

        신라악생 20명, 감 16명, 정 4명
        금생 2명
        무생 2명

 

  신라의 가야고와 백제의 군후도 일본에 전했는데, 가야고를 신라금(시라기고도), 군후를 백제금(구다라고도)라고 하며 일본에 전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삼국 중에서 신라 음악이 먼저 일본에 전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는 연대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당시 교역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고구려보다 앞서 일본에 음악을 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외적인 면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북조와 서역 지방에서 음악을 받아들였고,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신라는 중국을 거쳐 서역 지방에서 음악을 수입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백제가 더욱 그러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음악을 받아 자국화 시킴으로써 세 나라가 각기 고유한 음악 문화를 형성하였고 이를 다시 일본에 전하여 고대 일본 음악문화 형성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에 전한 고구려와 백제의 악기가 같음에도 일본 궁중에 고구려 음악과 백제 음악을 나누어 연주하게 하고 가르쳤던 것은 두 나라의 악기는 같으나 음악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풍류마을 http://www.kmusic.org/main.ph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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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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