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의 이해

[스크랩] [국악의 역사 Part 6] 고려의 음악

우리음악 2009. 4. 28. 15:59

 

 

 

 

 

국악의 역사 Part 6

 

 

 

 

 

                              고려의 음악                           

 

 

 

 
  중세의 음악은 고려 시대의 음악을 말하며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왕조가 바뀐 1392년까지, 475년간의 시기에 해당한다. 고려 왕조의 교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대 국가의 왕조가 바뀐 의미보다 중세 사회의 전환과 사회적 변동에 큰 뜻을 두고 있다. 즉 삼국을 계승한 불교와 유교를 채용함으로써 통일 국가의 정치 이념을 성립시켰으며, 지방의 호족들이 점차 문벌 귀족화되어 이들에 의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이루어지면서 귀족중심의 사회를 이룩하였다. 음악도 전 시대의 것을 계승하는 한편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의 음악이 전래되어 삼부악(三部樂)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향 악
  향악(鄕樂)은 동토(東土) 즉 동쪽 나라의 음악이라는 뜻으로서 우리 나라 음악을 말한다. 향악은 신라 통일시기에 당나라 음악이 들어오면서 당악에 대한 우리 음악이라는 의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당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모든 우리 음악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에 중국과 서역 지방에서 들어온 음악도 고구려화, 백제화, 신라화되었으므로 순수한 우리 음악과 삼국화된 음악 모두 향악에 속한다.

 

1. 향악곡
  고려시대에 노래한 향악곡은 다음과 같다.

 

정읍(井邑). 동동(動動). 무애. 서경(西京). 대동강(大同江). 오관산(五冠山). 양주(楊州). 월정화(月精花). 장단(長湍). 정산(定山). 벌곡조(伐谷鳥). 원홍(元興). 금강성(金剛城). 장생포(長生浦). 총석정(叢石亭). 거사연(居士戀). 처용(處容). 사리원(沙里院). 장암(長巖). 제위보. 안동자청(安東紫靑). 송산(松山). 예성강(禮成江). 동백목(冬栢木). 한송정(寒松亭). 정과정(鄭瓜亭). 풍입송(風入松). 야심사(夜深詞). 한림별곡(翰林別曲). 삼장(三藏). 사룡(蛇龍). 자하동(紫霞洞)

 

  이와 같이 고려 시대의 향악곡은 속악이라는 이름으로 32곡의 이름이 적혀 있고,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보면, 조선조 초기에는 향악이라는 이름으로 50여 곡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와 백제의 민간 속어로 되어 있다고 한다. 여러 문헌을 통해 이밖에도 많은 향악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향악기
  고려 시대에 연주된 향악기는 다음과 같다.

 

현금(거문고-줄 6). 가야고(줄 12). 대금(구멍 13). 비파(줄 5). 장구. 아박(6매). 무애(장식 있음). 무고. 해금(줄 2). 피리(구멍 7). 중금(구멍 13). 소금(구멍 7). 박(6매) 등이다.

 

  이 중에서 거문고. 가야고. 비파와 대금. 중금. 소금은 신라의 3현 3죽이며 새로 첨가된 악기는 장구. 해금. 피리이다. 결국 고려 때에는 당악기인 장구와 해금, 그리고 고구려 때 서역 지방에서 들어온 피리가 향악을 연주하게 되어 고려의 향악은 더욱 풍부해 졌다. 위의 악기 소개에서 그 순서를 보면, 아박. 무애. 무고를 중심으로 앞에 기록된 거문고. 가야고. 비파. 대금. 장구는 소리가 부드럽고 작아서 노래의 반주에 사용되었고, 그 뒤의 악기인 해금. 피리. 중금. 소금은 소리가 크기 때문에 무용 반주용으로 쓰였다. 물론 독주 또는 몇 개의 악기로 편성되는 중주로도 연주되었을 것이다. 아박은 동동 정재에 들고 치는 상아로 만든 작은 박이고, 무애는 무애 정제에 들고 추는 무구(舞具- 소품)이며, 무고는 무고 정재 때 가운데 놓고 춤추며 치는 북을 말한다.

 

 

당 악  

  당악(唐樂)이라 함은 당나라의 음악과 송나라 음악 그리고 원나라 음악을 합친 이름으로 향악의 대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당악과 향악은 좌방악(左坊樂)과 우방악(右坊樂)이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궁중의 연례 때 정전(正殿)을 중심으로 서쪽인 왼편에 당악기를, 동쪽인 오른편에 향악기를 배치하여 연주했던 점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 당악을 좌방악, 향악을 우방악이라 불렀던 것은 악기 배치와 관계되어 붙인 이름이다. 또 당악이나 향악이라 말할 때 음악 뿐 아니라 춤과 악기를 모두 합친 뜻을 가진다.

 

1. 당나라 음악
  당나라 음악은 신라 통일이후로부터 들어왔는데 기록으로는 제 4대 광종(949년 ~ 975년) 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악기와 음악인을 초청하였고 그 자손으로 하여금 음악을 세습시켰으며, 제 25대 충렬왕(1274년 ~ 1308년)에 이르러 김여영이 관리하였고, 제 27대 충숙왕(1313년 ~ 1330년) 때까지 자손의 세습으로 음악을 연주 관리하였다고 하였으나 그 음악은 알 수 없다. 고려에 들어온 당나라 음악은 100여 곡이나 되었으나, 큰 곡의 하나인 곡파(曲破)만이 곡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2. 송나라 음악
  고려에 들어온 송나라 음악은 교방악(敎坊樂)과 사악(詞樂) 두 형식의 음악이다. 교방악은 여자들의 노래와 춤을 말하고, 사악은 노래와 관현악으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사악은 성악과 관현악의 가락이 거의 같으므로 성악이라 말할 수도 없고 또 기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성악과 기악 일체의 음악 형식이다.

  제 11대 문종(1046년 ~ 1083년) 27년(1072년)에 포구락(抛毬樂).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 왕모대(王母隊)가 들어왔으며, 1078년부터 1085년 사이에 송나라에서 음악인을 초청하여 송나라 음악을 가르치게 하였다. 송나라에서 들어온 포구락과 구장기별기는 1073년 팔관회에서 공연되었고, 1077년 연등회에서 왕모대가 공연될 만큼 교방악이 큰 행사에 쓰였다. 고려 때의 교방악은 다음과 같다.

 

     포구락/왕모대/헌선도/수연장(壽延長)/연화대/구장기별기/오양선(五羊仙)

 

  송나라의 사악은 교방악보다 훨씬 많은 곡이 연주되었다. [고려사] [악지] `당악'조에는 43편의 곡이름과 가사가 기록되어 있다.

 

 석노교 곡파(惜奴嬌 曲破) 만년환 만(萬年歡 慢). 억취소(憶吹簫). 낙양춘(洛陽春). 월하청 만. 전화지 령(轉花枝 令). 감황은 령(感皇恩 令). 취태평(醉太平). 하운봉 만(夏雲峰 慢). 취봉래 만(醉蓬來 慢). 황하청 만(黃河淸 慢). 환궁악(還宮樂). 청평악(淸平樂). 여자단. 수룡음 만(水龍吟 慢). 경배악(傾杯樂). 태평년 만(太平年 慢). 중강창(中腔唱). 금전락 만(金殿酪 慢). 답가창(踏歌唱). 안평악(安平樂). 애월야면지 만(愛月夜眠遲慢). 석화춘조기 만(惜花春早起 慢). 제대춘 만(帝臺春 慢). 천추세 령. 풍중류 령(風中柳 令). 한궁춘 만(漢宮春 慢). 화심동 만(花心動 慢). 우림령 만(雨淋鈴 慢). 행향자 만(行香子 慢). 우중화 만(雨中花 慢). 영춘락 령(迎春樂 令). 낭도사 령(浪淘沙 令). 어가행 령(御街行 令). 서강월 만(西江月 慢). 유월궁 령(遊月宮 令). 소년유(少年遊). 계지향 만(桂枝香 慢). 경금지 령(慶金枝 令). 백보장(百寶粧). 만조환 령(滿朝歡 令). 천하락 령(天下樂 令). 감은다 령(感恩多 令). 임강선 만(臨江仙 慢). 해패 령

 

  이 밖에도 조선조 초기까지 연주된 사악은 모두 70여 곡이 넘는다.

 

3. 원나라 음악
  제 23대 고종(1213년 ~ 1259년) 46년(1259년)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아 굴복한 이후부터 제 31대 공민왕(1351년 ~ 1374년) 5년(1355년) 배원정책이 단행될 때까지 약 100년간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 아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호적(胡笛). 호무(胡舞). 호가(胡歌)를 왕가나 귀족계급에서 잠시 즐겼고, 태평소가 원나라에서 들어왔으며 대취타의 내취(內吹)를 조라치(照羅赤)라는 몽고말을 쓰는 것 등을 보아서 고려는 약간의 원나라 음악을 받았으나 영향은 크지 않았다.

 

4. 당악기
  고려 시대에 연주된 당악기는 다음과 같다.

 

방향(철 16편). 퉁소(구멍 8). 적(구멍 8). 피리(구멍 9). 비파(줄 4). 아쟁(줄 7). 대쟁(줄 15). 장구. 교방고. 박(6매)과 생(笙). 당적. 당비파 등이 사용되었고, 피리는 당피리를 뜻하고 비파는 향비파이다.

 

  이 밖에 중금이 당악으로 편성되었는데 향비파와 중금은 3현 3죽에 속한 향악기이므로 당시 당악 편성에 향악기가 일부 포함되어 있어 순수한 당악기만으로 당악를 연주한 것이 아니다. 또 이러한 편성은 당나라 음악이나 송나라 음악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아 악

  제 16대 예종(1105년 ~ 1122년) 9년(1114년) 사신 안직숭이 귀국할 때 송나라 휘종이 신악기와 악보 및 지결도를 보냈다. 악기들은 다음과 같다.

 

       철방향 15. 석방향 5. 비파 4. 오현 2. 쌍현(雙絃) 4. 쟁 4. 공후 4. 피리 20. 적 20. 지 20. 소 10. 포생(匏笙) 10. 훈 40. 대고 1. 장구 20. 박판 2

 

  악기와 함께 악보와 지결도 각 10권을 보냈는데, 이 악기중에서 훈. 지. 소는 아악기이고 나머지는 속악기로서 당악에 편성되는 악기들이다. 이 악기들은 신악기, 음악을 신악(新樂)이라 하였고 1114년 10월 태묘 제례에 그 동안 연주해 왔던 향악과 함께 사용하였으며, 신악기는 점차 당악기로 사용되었다.

  신악기를 보내준 데 대한 하례사로 가있던 추밀원지주 왕자지(王字之)와 호부낭중 문공미(文公美)가 예종 11년(1116년) 6월에 귀국하는 길에 송나라의 휘종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냈다. 이것이 중국의 아악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들어온 사례로서 대성악(大晟樂) 또는 대성신악(大晟新樂)이라고 한다. 대성악기는 등가(登歌)악기와 헌가(軒歌)악기로 나누는데 들어온 악기는 다음과 같다.

 

[등가악기]
편종 - 정성(正聲) 16개, 중성(中聲) 12개
편경 - 정성 16매, 중성 12매
금(琴) - 1줄. 3줄. 5. 7. 9줄 각 2대
슬(瑟) -2대
지 - 정성 2, 중성 2
적 - 정성 2, 중성 2
소 - 정성 2, 중성 2
소생(巢笙) - 정성 2, 중성 2
화생(和笙) - 정성 2, 중성 2
훈 - 정성 2, 중성 2
박부 - 2
축(祝) - 1
어 - 1

 

[헌가악기]
편종 - 정성 16개 9틀, 중성 12개 9틀
편경 - 정성 16매 9틀, 중성 12매 9틀
금 - 1줄 5대, 3줄 13대, 5줄 13대, 7줄 16대, 9줄 16대
슬 - 42대
지 - 정성 24, 중성 24
적 - 정성 24, 중성 24
소 - 정성 22, 중성 22
소생 - 정성 21, 중성 21
우생 - 정성 15, 중성 15
훈 - 정성 14, 중성 14
진고(晋鼓) - 1
입고(立鼓) - 2
비고 - 1
응고(應鼓) - 1
축 - 1
어 - 1

 

  악기 외에도 연주의 시작과 끝냄을 알리는 휘번과 무구, 의물, 의관, 무의 등 대성악 연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보냈다. 고려에 들어온 대성악은 예종 11년 10월에 태묘 제사에 연주되었고, 예종 다음 임금인 제 17대 인종(1122년 ~ 1146년) 12년(1134년) 1월 적전에 연주되었다. 대성악은 큰 제사인 태묘를 비롯하여 원구, 사직과 중간 제사인 선농, 선잠, 문선왕묘 제례에 편성 연주되었다. 제 18대 의종(1146년 ~ 1170년) 때 거행된 태묘 제례와 문선왕묘 제례의 절차와 음악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송나라에서 들어온 대성악은 태묘를 비롯한 궁중의 주요한 제사에 연주되었으나 제 19대 명종(1170년 ~ 1197년) 이후 제도가 불완전하게 되어 제례 절차의 아헌. 종헌. 송신에 향악을 연주하였다. 즉 명종 18년(1188년) 2월에 직업을 바꾸고 도피한 아악연주자들로 하여금 본업으로 돌아오도록 명령을 내릴 만큼 예종 - 인종 - 의종 3대 약 70년간 지속되어온 악기 편성과 음악 춤의 제도와 절도 등 아악이 부실하고 문란해졌다. 더욱이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입을 받아 국내가 혼란하여지고, 의종 말엽에는 유신(儒臣)들이 함부로 제도를 바꾸었으며, 나라의 권력으로 아악연주자들을 아악연주에 참여시켰으므로 노래하는 사람은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악보만 외우는 정도였다. 아악이 본래의 제도대로 연주되지 않게 되자 승지 서온을 송나라에 보내 춤을 배워오게 하여 아악의 제도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제 31대 공민왕(1351년 ~ 1374년) 8년(1359년)에 홍건적의 난으로 말미암아 서울을 옮긴 후 악공이 각지로 흩어져서 부실하게 이어져 오던 아악은 더욱 문란해 졌다. 홍건적이 두 번째로 침입한 공민왕 10년(1361년)의 다음해 5월에 구실(九室)의 신주(神主)를 태묘에 다시 모시고 악장(樂章)을 지었다. 공민왕 19년(1370년) 5월 성준득이 명나라로부터 돌아올 때 명나라의 태조가 편종 16틀, 편경 16틀, 생. 소. 금. 슬. 배소 각 1대씩을 보냈으며, 7월에는 강사찬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여러 음악에 정통하고 기예가 뛰어난 사람을 초청해서 음악을 전수하도록 하였다.

 

  공민왕 21년(1372년)에 홍사범을 중국으로 보내, 아악이 부실하고 명나라 태조가 준 악기만으로 태묘 제례 연주에 충당할 뿐 나머지 제사에는 편종과 편경이 부족하므로 이 악기들을 사오도록 하였다. 이처럼 공민왕의 아악 복구 열의에도 불구하고 아악은 그 많은 악기와 의물 및 악공들을 법제대로 갖출 수는 없었다. 궁중 제례에 연주되었던 아악이 고려 마지막 임금인 제 34대 공양왕(1389년 ~ 1392년) 원년 3월 조회에서 연주되었다. 아악은 고려말에 이르러 거의 명맥만을 이어왔다.

 

 

고취악과 위장악

  고려 궁중의 행사는 제사와 연회 외에도 많이 있다. 대개 소규모의 관현악단을 배치해 놓고 임금의 출궁과 환궁, 태후 책봉과 세자 탄생과 세자비 책봉에서 조서를 내릴 때, 사신을 영접할 때 등에 음악을 연주하는데 이것이 고취악이다. 임금이 행할 때는 위장과 노부의 두 양식으로 진행한다. 위장악은 위장과 노부에 연주되는 음악을 말한다.

 

  법가위장의 예를 들면, 교방악관 100명, 안국기와 잡기 각 40명, 고창기 16명, 천축기 18명, 연악기 40명, 취각군 20명이 가마 앞에 서고 취라군 24명이 가마 뒤에 서서 행진한다.

 

  법가위장외에도 궁중조회 때의 조회의장, 연등회와 팔관회에 참석하는 연등위장과 팔관위장, 여러 곳을 순시하는 순행위장 등이 있다. 위장과 달리 노부는 행진에 필요한 악대가 따른다. 법가노부의 예를 들면, 금정 10, 군인 60명, 강고 10, 도고 20으로 편성되는데, 금정 - 군인(10) - 강고 - 군인(30) - 도고 - 군인(20)이 대열로 가마 양쪽 옆으로 늘어서서 행진한다.

 

  노부에는 위장과 같은 종류의 것이 있고 왕태자 노부도 있다. 위장과 노부는 각. 나각. 금정. 강고. 도고와 같은 악기와 행진할 때 연주한다는 의미로 보아 후대의 취고수 또는 대취타로 연계되는 고취의 일종이다. 또 위장에 편제된 안국기. 고창기. 천축기. 청악은 수나라의 7부기와 9부기 또는 당나라의 10부기에 포함된 지역 음악으로서 이 때의 음악이 고 려 시대까지 계승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 개성에 거주하던 그 지역 사람들이 자국의 음악과 기예를 연출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위장은 고려악을 중심으로 중국과 서역까지 합쳐 화려한 퍼레이드가 펼쳐졌으리라 짐작한다.

 

  


정재무

  궁중 연례용 춤을 정재무(呈才舞)라고 하며, 제례용 춤을 일무(佾舞)라 한다. 정재무는 정재라고도 한다. 정재무는 우리 나라 본래의 전통적 향악정재(鄕樂呈才)와 중국에서 발생하여 그 영향을 받았거나 개작된 당악정재(唐樂呈才)가 있다. 당악정재는 죽간자(竹竿子)를 든 두 사람이 무용수를 인도하여 무대로 나오는데, 향악정재는 죽간자가 없이 무용수가 바로 무대로 나온다. 당악정재는 한문으로 된 치어(致語)와 구호(口號)가 춤추기 앞에서와 후에 있는데 반하여 향악정재는 치어와 구호가 없고 우리말로 된 간단한 노래를 부른다. 또 당악정재는 춤이 끝나면 치어와 구호를 부른 다음 죽간자가 인도하여 퇴장하는데, 향악정재는 춤이 끝나면 허리를 굽혀 절하고 뒷걸음으로 퇴장한다.

 

  고려 때 공연된 당악정재는 교방악에서와 같이 포구락. 왕모대. 헌선도. 수연장. 연화대. 구장기별기. 오양선과 답사행가무 등이 있었고, 향악정재는 무고. 동동. 무애. 아박. 광수무. 향발무. 학무. 방화대무가 있으며 당악정재 중에서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와 향악정재인 무고. 동동. 무애는 무보가 전하고 있어서 이들 정재들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으나 당악정재의 반주음악은 완전히 바뀌었다.

 

 

 


연등회와 팔관회  

  ‘연등회’란 등(燈) 공양의 법회를 뜻하여 4월 8일 석가 탄신일이라든지, 그 밖의 날에 등불을 밝히는 광명한 의식이었으나, 특히 2월 보름을 연등회라 하여 그 달에 왕이 반드시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행향(行香)한 후에야 비로소 대회가 열리고, 군신이 춤추며 노래하고 술을 마시면서 함께 즐기는 동시에 불덕을 기리고 천지신명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안태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팔관회’는 천령(天靈),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제사로서 고대에는 당연히 무격(巫覡)이 치르는 의식이었지만, 불교의 이름을 빌어 팔관회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팔관회가 처음에는 인간과 관계있는 자연을 신격화해서 천령, 오악, 용신 등에게 제사를 받들었다고 하지만, 그에 그치지 아니하고 왕실과 국가의 안태와 무궁을 기복(祈福)하기 위한 행사로 습합되었던 것이다.


  연등회나 팔관회는 본래 제사 의식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국민의 국태민안과 태평성대를 비는 국가적 축제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근본 성격을 차차 잃어버리고 대회를 마친 뒤 여흥인 가무와 잡희가 극성해서 축제의 본래 뜻을 잃어 가기도 하였다.

 

  태조가 즉위한 918년 11월에 팔관회를 열고 연중행사로 계속하였다. 태조(918년 ~ 943년) 26년(943년) 4월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렸는데, 그 6조에 "내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일이고 팔관은 천신(天神).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가감(加減)을 말하는 자를 일체 금하라."고 했듯이 연등회와 팔관회의 행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연등회는 연중 상반기의 큰 제사로서, 그 시기는 처음에 매년 1월 15일에 거행되다가 후에는 2월 15일로 바뀌었는데, 이 행사는 본래 선조께 재배함을 기회로 해서 축수(祝壽)의 향연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연등회는 불교적 요소는 조금도 없었다. 이와 함께 광명을 신성시한 우리 민족은 불을 소중히 하고 불에 대한 신앙까지 갖게 되었으며 불교에 융합되어 그 향태를 불교에서 취하게 되면서 불교적인 행사가 되었다.

 

  연등회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로 나누고, 소회는 15일 대회는 전날 14일에 거행하였는데, 왕궁이 있는 개성에서부터 지방의 향읍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행하였다. 국도인 개성에서의 대회는 군신이 함께 조상을 참배한 후 음악과 춤 노래 그리고 갖가지 놀이가 있었다. 팔관회는 하반기의 큰 제사로서 매년 11월에 거행되었다. 팔관회는 연등회 보다 시설이 훨씬컸으며 천령(天靈). 오악(五岳).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 등 토속신을 제사한다. 팔관회도 소회일과 대회일로 나누고 소회일은 대회일의 전날인 14일에 행한다. 제사를 지낸 후 태자 이하의 신하들이 임금께 송축의 축사를 올리고 이웃한 중국의 송나라와 일본, 여진의 사절들이 선물을 바치고 축하를 드리게 되는 연향이 진행된다.

 

  궁중의 넓은 뜰에 무대를 설치하고 사방에 등을 밝혀 현란하게 꾸민 위에서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龍). 봉(鳳). 코끼리(象). 말(馬). 차(車). 배(船)등 여러 형태의 춤과 온갖 놀이와 재주를 벌였다. 팔관회에서 벌이는 온갖 놀이의 사선악부는 신라 선풍이고, 국선 또는 화랑이 가무를 담당하였는데 백희는 잡희로 격하되었고 선풍이 점차 쇠퇴하여 속인이 대체되었다. 사선악부가 유교주의를 취한 제 6대 성종(981년 ~ 997년) 때 잡기로 천시되었고 신라의 화랑이 고려를 거치는 동안 속인으로 변하고, 조선조에 이르러 광대(廣大). 재인(才人). 창우(倡優). 우인(優人) 등으로 취급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배불정책으로 태조 때 팔관회가 폐지되었고, 연등회는 축소되어 석가탄신일에 행해져 이 유풍이 관등놀이로 이어지고 있다.

 

 

 

 

나례와 산대잡희 

  나례(儺禮)는 한 해의 재앙의 근원인 사귀를 쫓아내고 즐겁고 경사스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음력 12월 제야에 궁중에서 행하는 의식이다. 나례는 점차 악귀를 쫓아내는 종교적 의식에 그치지 않고 관중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 즉 나희(儺戱)로 변하였는데, 여기서 우인 또는 창우라고 부르는 직업인이 발생하고 이들이 연출한 우희 또는 잡희가 12세기 초에 출현한다. 산대잡희는 무대를 높이 가설하고 각종 놀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산대잡희 또는 산대잡극은 대개 정재무인 헌선도, 가면무인 처용무와 곡예로서 장간기가 연출되며 동물의 모의춤도 공연한다. 산대잡희는 연등회와 팔관회 외에도 임금의 관람과 개선 장군의 환영연에도 행하였다. 나례와 산대잡희는 조선조에 전승되어 태종. 세종. 성종. 중종을 계속하여 광해군 때에 나례도감. 산대도감을 설치하여 이를 관리하였다.

 

 

 


무 속  

  궁중이나 민간 할 것 없이 고려 때는 무속신앙이 풍미하였다. 비를 내리게 하고 복을 빌며, 재앙을 물리치고 병을 고치며 서낭과 산신(山神)을 섬기고 비는데 무당이 주재하였고 임금이 참여하기도 했다. 고려 때의 무속은 불교가 흥성했던 중엽 이전보다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한 중엽 이후부터 더 성행하였으나 음악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때의 음악을 수집한 [시용향악보]에 굿 음악으로 보이는 12곡의 악보와 가사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나례가(儺禮歌, 평조). 성황반(城隍飯, 계면조). 내당(內堂, 계면조). 대왕반. 잡처용(雜處容, 평조). 삼성대왕(三城大王, 평조). 군마대왕(軍馬大王, 평조). 대국 1(大國 一, 평조). 구천(九天, 평조). 별대왕(別大王, 평조) 등이다.

 

 

 

음악기관  

  고려의 국가 체계가 점차 잡혀가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그 체제와 이념에 맞는 음악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여기에 적절한 새로운 음악 기관이 설립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수시로 거행하게 되는 궁중의 여러 의식과 행사에는 반드시 음악을 연주하였으므로 국가 기관으로서의 음악 관청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했고 음악인들을 궁중에 상주시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인들의 교육과 훈련, 연주와 행정을 관장할 기관의 필요에 따라 신라에서는 음성서 또는 대악감이 설치되었는데, 고려의 음악 기관은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은 관계로 신라의 음성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려가 개국하고 궁중의 여러 의식에 음악이 연주되었기 때문에 음악인들이 궁중에 상주했겠으나 음악을 관리할 국가기관은 제 7대 목종(997년 ~ 1009년) 때 대악서 설치가 처음이었다. 목종 이후 공양왕까지의 음악기관 설치 내용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중세의 음악 즉 고려 음악의 특징은, 아악을 들여와 국가적인 제례를 완비시켰으며 당악이 조회와 연례에 쓰임으로써 고대인 삼국 시대보다 훨씬 다양하고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 문화는 우리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송나라가 이룩한 것을 수입한 것뿐으로 시대가 지남에 따라 자연히 소멸 또는 변화되어 갔다. 한편, 사대주의의 여파로 천시되었던 향악은 속악으로 또는 우방악으로서 아악과 당악으로 채우지 못한 제례. 조회. 연례의 빈자리나 여밀 정도의 멸시를 받았으나 화려하고 위세가 당당하던 수많은 당악은 사라지고, 아악은 쇠퇴하여 각종 제례에 연주되지 못하고 그 형태만을 유지한 채 근세의 조선조로 넘어간다.

 

 

 

 

 

 

[출처 : 풍류마을 http://www.kmusic.org/main.php3]

 

 

 

 

 

[참고 동아일보 2007.6.11 '고려음악은 진정한 월드뮤직이다' ]

 

  김명준 단국대 아시아아메리카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최근 '중세 동서 시가류의 비교 연구'라는 주제로 열린 이 연구소의 정기학술대회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고려 궁중음악의 외래적 점유'라는 논문을 통해 고려인들은 궁중이건 일반 저잣거리건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들의 음악에 해외 음악의 요소를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를 체화시켰기 때문에 월드뮤직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의 5대 정재(궁중춤) 중 하나인 '연화대()'가 대표적인 예. 김 연구원에 따르면 '연화대'는 중국 북위의 자기무(¤)를 가리키는데 이 춤은 원래 서역국인 소륵국()에서 유래했다.

  또한 임금이 행차할 때 고취악으로 고창기(), 안국기()같은 음악이 연주됐는데 이들 음악은 '고창', '안국', '천축' 등 서역 국가 이름을 딴 것들이다. 또 당시 고려에서 구할 수 없던 코끼리 어금니로 만든 '아박'이라는 악기도 사용됐다.

  김 연구원은 "고려의 궁중음악 중 아악()과 당악()은 각각 송나라, 당나라로부터 전래된 음악"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흡수된 서역·중국 음악은 민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청산별곡'에 서역 악기인 '해금'이 등장하는 것을 주목했다. 민간음악으로 분류되는 '청산별곡'에 서역 악기를 연주하는 내용이 들어갈 만큼 서역 음악이 민간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고려속요 '쌍화점', '처용가'에 원나라의 잡극과 이슬람의 문학적 요소들이 들어갔다고 강조했다.

  김 연구원은 "고려 시대는 역사적으로 보편주의 문화가 활발했던 시기"라며 "고려 음악에는 우리 것만이 아니라 중국 및 서역의 요소도 반영됐다"고 말했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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