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의 이해

[스크랩] [국악의 역사 Part 7] 조선의 음악

우리음악 2009. 4. 28. 15:59

 

 

 

 

국악의 역사 Part 7

 

 

 

 

 

                                 조선의 음악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왕조의 교체와 함께 정치·경제·사회·문화 여러 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양반을 중심으로 한 신분제도와 가부장적 질서에 의한 명분과 인륜이 강조되는 사회로 변화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학문과 예술이 유교사상의 바탕위에서 형성되었다. 양반은 유교 특히 성리학을 발달시켜 성리학 중심의 상층문화를 만들었고 평민은 불교와 도교 및 기타 토속 신앙인 무속이 융합된 기층 문화를 만들어 양반과 서민의 문화적 이중 구조를 형성하였다.

  15세기에는 고려의 문화를 비판·정리하고 민족문화 지향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말을 기록하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고 우리 음악을 기록하는 정간보가 창안되었다. 따라서 유교적 사대주의는 왕성한 민족적 자각에 의해 성리학적·민족주의로, 문화적 추종주의는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에 의해 창조적 주체사상으로 전환한 근세 문화 사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 전기의 음악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태조 원년(1392년) 문무백관의 제도를 새로 정할 때 음악을 다스리는 아악서와 전악서를 계승하면서 악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정도전이 납씨가, 궁수분곡, 정동방곡, 몽금척, 수보록을, 하윤이 근천정, 수명명, 도성형승지곡, 도인송도지곡 등의 노래를 지어 올렸고 이들 악기는 관현반주에 올려 여러 궁중의식에서 연주되었다. 그런데 이 곡들은 가사만 달랐지 고려 때의 음악을 개작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음악정리사업이 비로소 이룩되었다. 세종대왕은 박연을 중심으로 중국계 아악과 아악기를 정비케 하고 친히 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낼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여 악보를 간행하고 향악을 새로 작곡하는 등 빛나는 업적을 후세에 남겼다.

 

  세종 초의 아악정비는 악학별좌 박연에 의하여 아악기 제작에서 시작되었다. 예조 산하의 악기도감이 1424년 설치되고 박연이 율관을 제작하고 그 율관에 맞추어 편경편종이 제작되었다. 박연은 이 외에도 아악정비를 위하여 악서를 편찬하고 조회아악과 회례아악을 제정하고, 제향아악을 정정하였다.

 

                        <편경>

 

 

                         <박연>

 

                                                                                           

 

 

  세종대왕은 중국계 아악을 진작시키면서도 '우리 나라는 본시 향악을 익혀왔는데 종묘 제향때 먼저 당악을 연주하고 겨우 셋째 잔 드릴 때 이르러 향약을 연주하니 조고(祖考)들이 평일에 듣던 음악을 아뢰는 것이 어떠한가?' '아악은 본래 우리 나라 음악이 아니고 실은 중국음악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살아 생전에는 향악을 듣고 죽으면 아악을 연주하니 어찌된 일이냐?' ' 우리 나라 음악이 비록 진선(眞善)은 못되나 중원(中原)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중원의 음악이라고 해서 또한 어찌 바르다고 하겠느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급기야 세종 27년(1445년) 용비어천가를 반포한 뒤를 이어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보태평, 정대업, 창수곡, 경근곡 등 신악(新樂)을 만들었다. 그 중 여민락은 거동음악으로 채택되고 보태평, 정대업은 세조 10년(1464) 이후로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지금가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향악을 기보하기 위한 정간보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 성종 24년(1493)에는 예조판서로서 음률에 밝던 성현과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왕명에 의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악학궤범』은 조선 전기의 음악을 집대성한 악서로서 전부 9권3책으로 되어 있고 음악이론, 악기진설법, 무용, 악기, 의복, 의물 등에 대한 것을 총망라하고 있다. 이 『악학궤범』은 조선 후기에 전란으로 말미암아 음악을 복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의 음악기관은 건국초기에 종묘제례악의 악기연주를 관장하던 아악서와, 종묘제례악 등가의 노래와 임무를 맡은 봉상시(奉常寺), 연향에 쓰이는 당악과 향악의 연주활동을 맡은 전악서, 음악이론 연구와 악복 및 의례의 고증과 악서 편찬을 맡은 악학(樂學), 악공과 관현맹인(管絃盲人)과 여기(女妓)가 연주하는 향악과 당악의 실기연습을 맡은 관습도감(慣習都鑑)등 다섯 기관이 있었다.

  이것들은 세조 3년 장악서와 악학도감으로 정비되고 세조 12년에 장악서로 통합되어 성종 때 장악원으로 계승되기까지 분산되어 있었다. 세조 3년 아악서와 전악서를 통합한 장악서의 직제를 보면 고려 이후 당악이 좌방(左坊), 향악은 우방(右坊)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아악연주를 맡은 악생이 좌방에,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는 악공은 우방에 소속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당악이 아악에 좌방의 위치를 빼앗기고 향악과 함께 우방에 통합됨으로써 당악기의 향악기화 또는 당악이 향악화는 가속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는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 외에도 세조가 창안한 오음약보, 성현이 창안한 합자보 등 새로운 기보 방법이 개발되어 고려 때부터 사용되었던 육보, 율자보, 공척보와 더불어 많은 악곡들을 후대에 남겨주는데 큰 구실을 했다.


  * 종묘제례악
  조선 역대 임금을 모신 사당인 종묘의 제향에 연주되는 음악이다. 세종 17년(1435) 중국계 고취악과 향악을 참작하여 제정, 세조 9년(1464)에 개작되어 종묘제향에 연주되어 왔다. 조종의 문덕을 찬양한 보태평 11곡(희문,기명,귀인,형가,즙녕,융화,현미,열광정명,대유,역성,진찬)과 조종의 무공을 찬양한 정대업 11곡(소무,독경,탁정,신정,정세,선위,분웅,순응,총유,혁정,영관)이 있다. 보태평은 5음 음계의 황종국 계면조이며 무무가 따른다.
  한문 가사로 된 악장이라는 노래가 있고 연주는 당상의 등가악단, 당하의 헌가악단이 교대로 연주하며 편경,편종을 비롯한 팔음의 모든 악기가 동원된다.

 

 

 

조선 후기의 음악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크고 작은 전란은 많은 악기를 소실시키고 악공들이 흩어지게 했다. 그래서 부족한 악기를 보충하기 위해 때에 따라 악기도감, 악기수개청, 악기조성청 등의 임시기관이 세워졌고 음악문화의 복원을 위해『악학궤범』이 수차 복간되었으며 『시악화성』, 『악통』 등의 새로운 악서도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아악의 명맥만 유지하도록 했을 뿐 아악을 비롯한 궁중음악은 전반적으로 하향 추세를 보였다. 대신에 중인출신의 부유한 농공상인과 지방의 선비들이 새로운 음악수용층으로 등장하게 되고 그들의 사랑방에서 연주되는 실내악들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이들이 주로 즐기던 음악은 크게 정가(正歌)라고도 하는 성악곡 가곡(歌曲) . 가사(歌詞) . 시조(時調)와, 풍류라고 하는 기악곡 영산회상인데 가곡과 영산회상은 세월이 감에 따라 많은 변주곡을 낳아 점점 그 분량을 늘여서 커다란 모음곡이 되었다. 가사와 시조는 그 악보가 이 조선 후기에서야 발견되고 있어 음악으로는 이 때에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며 이들도 마찬가지로 점점 곡수가 많아졌다. 특히 정가와 풍류는 그 향수자들이 지식층이어서 수많은 악보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음악의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한편 남도 서사무가에서 종교와 무관하게 독립되어 새로운 장르로 탄생된 민속성악곡 판소리와 남도 무속의 춤반주음악에서 비롯된 민속합주음악 시나위 그리고 시나위와 판소리의 영향으로 탄생한 기악 독주곡, 산조 등의 민속음악은 서민들에게 폭발적인 애호를 받으면서 그 애호층을 양반에게까지 넓혀갔다.

 

  조선 후기 음악의 흐름은 전반적으로 첫째 성악곡이 기악화되는 경향, 둘째 기존곡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주곡이 파생되는 경향, 셋째 사이가락이 많이 들어가 선율이 복잡해지고 빠른 음악으로 변해 가는 경향(繁音促節), 넷째 낮은 음역의 곡에서 높은 음역의 곡으로 전환해 가는 고음화(高音化) 경향, 다섯째 농현이 별로 없는 꿋꿋한 음악에서 농현이 많이 유연한 음악으로 전환해 가는 경향, 여섯째 아기편성에서 악기가 축소되고 관현편성이 관악기위주의 편성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조선 후기 음악문화의 변화는 결국 크게 두 가지의 경향으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다시 옛날 음악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적인 경향과, 새로운 음악문화를 만들어 내려는 신음악문화주의로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선율이 단순해지고 느려지는 경향은 고대 주나라의 아악과 비슷해지려는 경향으로 주로 궁중음악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음악이 높아지고 빨라지고 가락이 복잡한 것으로 바뀌는 변화는 일반 음악 향수층들의 감각에 부응한 것으로 이러한 경향은 주로 민간음악, 즉 줄 풍류나 가곡 같은 음악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간의 신음악주의가 결국 조선 후기에 가사나 시조 같은 정악계통의 음악과 판소리, 산조 같은 뛰어난 민속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출처 : 풍류마을 http://www.kmusic.org/main.ph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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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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