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의 이해

[스크랩] [국악의 역사 Part 8] 광복이후의 음악

우리음악 2009. 4. 28. 15:59

 

 

 

 

국악의 역사 Part 8

 

 

 

 

 

                            광복이후의 음악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아래 민족 수난기의 음악은, 궁중 폐쇄에 따른 궁중 음악의 양식 변화, 정신적 질곡과 삶의 전도에 의해 문화 예술 향유에 대한 정서를 상실한 데서 오는 민간 음악의 침체, 그리고 한국인의 모임을 통해 얼과 의식을 육성하고 앙양하게 되는 굿, 특히 마을 굿을 미신이라 폄하시켜 금지시켰다. 한편,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음악이 유입되었으며, 전통문화 예술을 말살시키기 위해 서양 음악이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방관 내지 협조했던 것이 제국주의 일본의 정책이었다. 서양 음악의 유입은 한국 음악 문화의 큰 변동이다.

 

 

 

궁중 음악의 변천 

   19세기 말엽은 정치 사회면에서 격변기에 해당한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2년 동학농민혁명, 1893년 청일전쟁,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의 대한제국 선포 등 개화기로 알려진 사건들이 많았다. 이러한 사건들은 민간 음악보다 궁중 음악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따라서 궁중 음악이 위축되고 궁중 음악 연주가 소략해 질 수밖에 없다.

 

1.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조선조의 궁중제례는 종묘 사직 풍우뢰우 선농 선잠 우사 문묘 경모궁의 제사가 거행되었고 임진왜란 후에 관왕묘가 추가 되었으며 조선조 말엽까지 축소 변화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탈로 왕위가 폐위당하고 궁중이 폐쇄된 후 종묘와 문묘 외의 모든 제사는 폐지되었고 음악도 없어졌다.

   일제 시대의 종묘제례악은 사맹삭(四孟朔: 음력 1월, 4월, 7월, 10월)에 제사와 함께 연주되었고, 문묘제례악은 4월 15일과 9월 15일에 연주되었으나 악기는 불완전 편성이고 연주자는 많이 감소되었는데 1930년대에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


1930년대의 종묘제례악의 악현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등가>       집주(執籌)                            집사(執事)
                     휘(麾)                  박             아쟁
              젓대         젓대                    도창  도창  당피리  당피리  당피리          
              방향 편경 절고                   장고            편종       축               18명
       
    <헌가>       조촉(照燭)
                                                박 
             진고         편종                     도창  도창  장고  축  편경  방향
             당피리  당피리  당피리          젓대          젓대           해금
             대금(大金, 징)     태평소                                                        18명

 

   악현에서 보는대로, 등가에서는 거문고 향비파 가야고 생 당비파 훈 당적 퉁소 어가 빠졌으며, 헌가에는 노도 어 생 훈 당적 소금이 없다. 이것은 18세기 후반 정조 때의 악기 편성과 비교한 것으로 악기 편성의 결손은 일제침탈 이후의 일일 것이다.

 

  또, 1930년대의 문묘제례악의 악현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등가>           휘                                       집사
                                                    박        
                 금                노래            노래                   슬
                 어  편경  절고  특경         특종        축      편종
                 적       약         훈            소     지   지        지                      21명

    <헌가>                   조촉
                       노도                                  노동
               진고     어    편종             축       편경      노도
               훈    지   지    지              부        적         약
                                                  박                                                     17명

 

   정조 때의 편성과 비교해 볼 때 1930년대 문묘제례악 등가에는 노래와 생이 빠진 대신 특종. 특경. 박이 첨가되었고, 헌가는 관. 고사 없는 대신 노고. 박이 편성되었다.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의 악기 편성을 보면 종묘제례악의 편성이 그 변화가 심하다.

 

2. 음악 기관과 악가의 변천
   15세기 성종 이후 음악기관이 장악원으로 지속하다가 고종 32년 교방사(敎坊司)로 고치고,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즉위한 해에 교방사를 장악과로 개칭하여 전악(典樂)이나 악사의 이름을 국악사와 국악사장으로 바꾸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국악사와 국악사장을 아악사와 아악사장으로 바꾸어 이 명칭을 1945년 해방되기까지 사용하였다. 장악과는 1910년 아악대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음악 기관의 명칭과 악사수의 변천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아악대는 한일합방 이후 1913년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바꾸고, 궁중에서 나와 서울 종로구 당주동의 봉상시 술창고를 개수하여 창사로 썼으며, 1925년 종로구 운니동에 청사를 지어 옮겼다. 한편, 이왕직아악부를 둔 이왕가(李王家)는 아악사들의 세습제도를 폐지하고 1919년 아악부원양성소를 설치하여 아악생을 모집, 교육하여 궁중 음악을 계승시켰다. 이왕직아악부에 입학한 아악생들은 전공악기 외에 여러 악기와 악장 노래 정재들을 두루 배웠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매년 선발한 아악생들은 3년 또는 5년간 교육받은 후 졸업하면 이왕직아악부에 근무하도록 하였는데 이왕직아악부의 업무는 대외적인 연주 공연 외에 악서와 악보 편찬, 궁증 음악을 비롯한 여러 양식의 음악을 오선보로 채보하는 일과 악생들이 수행하는 일들을 지도하였다.

 


민간 음악의 양상


1. 이습회와 조양구락부

   1932년 10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악사들이 중심이 되어 아악의 보존육성을 꾀하기 위해 조직한 연주모임.

   1930년대의 이왕직아악부는 악인 50여 명 중 김영제·함화진·이수경·김계선·김수천·이용진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진들이었기 때문에 아악 전승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에 아악 전승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이습회를 조직하여 노악사들의 전통을 후학들에게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매월 1회 모여 약 2시간 정도의 연주를 했는데, 연주방법은 독주 또는 합주로 하되 합주보다는 독주에 치중했다. 매회마다 심사원을 두고 3회까지 출전한 연주곡목을 심사하여 1~3등과 특등에게 1년에 1회 시상했다. 1932년 10월 13일에 제1회 이습회를 개최하여 1945년까지 약 150회를 거듭했다.


   1930년대의 이왕직아악부 아악수는 50여 명이었다. 이들 중에서 김영제(이론, 가야고). 함화진(이론, 거문고). 최순영(피리). 이수경(거문고, 정재). 김계선(대금). 김수천(장구). 황종순(장구). 고영재(대금). 이용진(피리)을 제외하고 모두 아악부원 양성소 졸업생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가르쳤던 선인들의 음악을 모두 계승하기란 교육연한으로는 부족하기에 연주를 통해 전통 음악을 전승하고자 됐다.

 

   궁중음악은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의 연주 외에는 다른 공연이 없었으므로 이습회를 통해 조선조의 궁중 음악이 현재까지 계승되었다. 인멸되어 가는 바른 음악(정악, 正樂)을 복구하고 나라를 빼앗긴 국민들의 입지를 바로잡기 위해 민간기구로 출발한 것이 조양구락부이다. 조양구락부는 1909년 9월 15일 발족하였으나, 1911년 6월 16일에 해산하여 곧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를 다시 출범하고, 박영효를 회장으로 한 2백여 명의 정악유지회를 조직하여 조선정악전습소를 후원하였다. 조선정악전습소는 1914년까지 3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재정 후원이 어려워지자 1916년 거의 해산 상태로 유지하다가 1935년 수요회(水曜會)가 조직되어 연주 활동만을 계속, 조선정악원의 이름으로 해방이되자 한국정악원으로 바뀌었다.

 

   조선정악전습소는 가요부. 음악부. 악구제조부로 구성, 음악부 아래에 조선 정악과 서양학과를 두었다. 조선악과: 가곡. 거문고. 가야고. 양금. 단소. 생황. 취악(吹樂) 서양학과: 성악. 악리. 창가. 풍금(오르간). 사현금(바이올린)

   조선정악전습소는 1년 과정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악과는 한진구. 이상준. 홍석후 등이 졸업하였고, 서양학과는 함화진(악리). 하대홍(성악). 홍영후(난파, 성악과 기악)등이 졸업하였다. 현재의 풍류에 속하는 여러 기악곡과 가 곡. 가사. 시조 등의 정악은 이습회와 조선정악전습소의 연주 및 교육으로 인해 끊기지 않고 전해 오는 것이다.

 

2. 조선성악연구회
   원각사가 폐쇄된 후 잠시 창극이 중단되다가 1933년 5월 10일 순천의 김종익의 후원으로 조선성악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조선성악연구회는 후진 양성과 직속 극단인 창극좌(唱劇座)에서 창극을 공연하였는데, 판소리 5마당 외에 배비장전. 숙영낭자전. 장화홍련전. 유충렬전 등을 창극으로 꾸미고,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한성준. 김연수. 임방울 등과 김초향. 박녹주. 김여란. 김소회 등 여류명창들이 가담하였다.

   1930년 임방울. 박초월. 박귀희 등이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을 조직하였으며, 곧 이어 박석기. 전일도. 김여란. 김소희 등이 화랑창극단을 조직, 창극활동을 전개 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예술 활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조선악부를 만들어 창극 활동을 통괄하였으며, 이동백. 박녹주. 신영채. 조몽실 등 50여 명으로 조선 음악단이 조선악부 산하에 창설, 박춘재. 김봉업 등 60여 명으로 가무단을 창단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3. 판소리의 전승
   일제 시대의 판소리는 명맥이 끊기지 않고 꾸준히 이어갔으나 이전 황금기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다만 일제의 음반회사의 음반 제작으로 판소리를 비롯한 여러 형식의 음악이 널리 보급되었을 뿐이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을 잇는 판소리는 5명창으로 알려진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이 중심 인물로 활동하였고, 이들의 뒤를 이어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김여란. 김연수 등이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4. 산조의 발전
   시나위가 제자리에 머무는 반면 산조는 유파(流派)가 생길 만큼 발전하였다. 시나위는 장단수가 적으며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연주기회가 없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산조는 1910년 이후 완전히 형식을 갖추고 틀을 만들었으며 가야금 산조를 비롯한 여러 산조들이 모두 산조로서의 내용과 형식이 완비되었다. 산조는 계보에 따라 유파가 형성되지만 유파의 산조를 전수받아 연주활동을 계속하는 중에 자신의 가락을 추가하여 전수받은 산조를 변형시킨다. 이런 방법으로 산조는 발전하였으며, 작곡가의 작곡이 아닌 연주자의 형성에 의해 악곡이 만들어졌던 것이 우리 전통 음악의 역사이며 특수한 발전 방법이다. 판소리는 스승의 소리를 흉내낼 만큼 가깝게 노래하는 것을 사진(寫眞)소리라 하여 이를 금하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 있는 소리로 노래하고 표현하되 자신의 가락은 첨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조의 형성과는 다르다.

 

   가야금 산조의 계보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한성기 ───────────김죽파
                              │  (1898~1950)                             (1911~1989)
                              │  최옥산 ───────────함동정월
                              │  (1905~1956)                            (1917~1994)
                              │                                               김춘지
                              │                                                (1919~1971)
김창조 ──────┤                            
(1865~1919)            ├─강태홍 ───────────원옥화
                              │  (1894~1957)                             (1928~1971)

                              ├─김병호                      
                              │  (1910~1968)                
한숙구 ──────┴─ 안기옥 ──┬─정남희 ─── 김윤덕
(김창조보다 연상임)        (1905~1978)│   (1927~1984)     (1918~1978)
박팔괘 ──────── 박상근 ──┴────────성금연
(김창조와 동년배)            (1905~1949)                            (1923~1986)

 

 

   거문고 산조는 백낙준이 형식화하였고, 김종기. 신쾌동. 박석기에게 전수하였고, 박석기는 한갑득에게, 한갑득은 김윤덕에게 전수하였다. 현재 거문고 산조는 신쾌동. 한갑득. 감윤덕의 세 유파가 있다. 대금 산조는 박종기 -> 한주환 -> 한범수에게 전수되었다. 강백천과 이춘선. 김광식도 대금 산조를 만들었다. 해금 산조는 지용구 -> 지영희로 이어지고, 피리 산조는 이충선과 최응래가 만들어 연주하였다. 이밖에도 아쟁 산조, 태평소 산조가 있으며 단소 산조와 양금 산조도 만든 바가 있으나 연주되지 않고 있다.

 

5. 잡가와 민요
   19세기 말엽의 잡가는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이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추교신 -> 박춘경 -> 박춘재 -> 주수봉으로 이어지고, 조기준 -> 최경식. 장계훈으로 계승되었다. 주수봉 -> 이진홍. 묵계월. 김옥심으로 이러지고, 최경식 -> 유개동. 정득만. 김순태로 계승되어 경기 12잡가와 경기 산타령이 전승되었다. 서도 잡가와 남도 잡가 그리고 민요도 경기 잡가와 마찬가지로 1902년 협률사가 설립되고, 1908년 원각사가 세워진 이후 극장프로그램으로 공연되고, 권번(券番)에서 노래하여 전성되었다.

 

6. 범 패
   신라 때부터 연주된 범패는 고려를 거쳐 조선조 말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11년 총독부의 사찰령이 반포되고 다음 해부터 범패와 작법(불교의식때 추는 춤)이 금지되어 일제시대에는 범패가 전승되지 못했다.

 

   조선조 초기부터 말엽까지 범패승 계보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창작음악, 악보, 음반  


   전통 음악 기법에 의하여 국악기로 연주하는 창작 음악이 오선보로 처음 작곡 되었다. 1939년 김기수는 이능화의 한문시를 노래와 국악 관현악 반주로 편성한 황화만년지곡을 작곡하여 1940년 부민관에서 연주하였으며 1941년 4중주 편성인 세우영을, 1945년 4월 관현악 고향소를 작곡하였다.

 

   악보는 이왕직아악부에서 악보화 작업을 진행하여 정간보와 오선보로 만들었으나 출판하지는 못했고 필사본을 현재 국립국악원이 보존하고 있다. 조선정악전습도 교사였던 김인식이 영산회상 양금보를 오선보로 채보, 1914년 3월에 출판하였고,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영산회상과 여민락을 오선보로 채보하였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음반은 빅타. 콜롬비아. 로얄. 폴리돌 등에서 조선조 말엽과 일제 초기에 연주되고 있던 전통 음악을 취입하고 음반을 제작. 판매하였다. 이때의 음반은 당시 음악의 실채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양 음악이 들어옴  


  서양 음악은 19세기 말엽부터 기독교가 들어오고 찬송가가 보급되면서 도입됐다. 대략 1882년 5월 22일 한미우호조약을 체결한 후 부터라고 본다.
  배재학당(1885), 이화학당(1886)이 생기며 서양문화를 가르치게되고 특히 1876년 11월 21일에 있었던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생들이 식 순서에 창가합창을 담당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지금도 흔히 부르는 스콧트랜드 민요이자 찬송가로 불리워지는 "Auld Lang Syne"에다가 한글 가사를 붙인것이었다. 이 가사는 나중에 애국가처럼 불리워져서 광복후에도 공식행사가 아닌 곳에서는 가끔 불리워지곤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때 행사장에 모였던 시민들은 생전 처음 듣는 서양식 노래에 신기함을 금치못했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 음악 이론을 최초로 소개한 문헌은 19세기 전반기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구라칠사금자보]인데, 이 문헌은 서양 음악이 널리 알려지기 이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일부 교인들이 찬송가를 불렀던 시기에 출간되었을 것이다. 인조 22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소현세자가 독일인 신부 벨과 친교를 맺고 천주상을 기증받고 돌아왔는데, 이것이 학문이 아닌 종교로서 가톨릭이 들어온 공식적인 시초이다. 개신교는 17세기 후반에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아펜젤러는 내한한 다음 해인 1886년 배재학당을 설립했고, 스크랜턴 부인도 같은 해에 이화학당을,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앨러스는 1887년 정신여학교를 세웠다.

 

1. 찬미가와 창가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도는 물론 교육. 의료사업과 계몽 활동을 펼쳤다. 찬미가는, 1892년 죤즈와 로스와일러의 공편인 악보없는 [찬미가]가 최초로 출판되었는데 27곡의 번역 가사가 실려 있다. 1893년 언더우드가 편집한 악보로 된 117곡의 [찬양가], 1895년 리와 기포드가 공편한 54곡의 [찬성시]가 남북장로교회에서 사용되었고,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사용할 [찬송가]가 출판되어 민간인에게까지 찬미가 또는 찬송가가 보급되었다. 창가라는 말은 일본에서 신교육령이 반포되던 해인 1879년 음악취조소(音樂取調所)를 설치, 1881년 일본 문부성에서 [소학창가집]을 엮었을 때부터 나온 낱말인데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창가를 가르쳤다.

 

2. 군악대 설치
   1896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한 민영환이 양식군악(洋式軍樂)의 설치를 임금계 주청하자 광무 4년(1900년) 12월 19일 칙령 제 59호로 군악대 설치령을 발표하고, 독일인 에케르트를 초청, 1901년 2월 19일에 그가 서울에 도착하여 양악식 군악대를 지위하였다. 군악대는 시위대와 시위기병기에 51명씩의 대원을 두기로 하였으며 대한애국가 외에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와 대한민국 행진곡 등의 행진곡. 가곡. 춤음악. 의식음악 등을 연주하였다. 군악대는 1915년 12월 12일에 해산되었고, 그 때까지 에케르트가 지도하였다.

 

 

                               <군악대장 독일음악가 에케르트>

 

 

   신교육 체제의 학교가 중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설립되어 서양 음악을 가르쳤고 많은 악대가 창설되어 서양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일본에 유학한 음악인들로부터 점차 서양 음악 수준을 높여갔고 또 서양 음악 교육의 질이 향상되어 갔다.

   한국 정신의 암흑기, 민족 음악의 정체기가 일제 식민시대라고 할 때 서양음악은 이 땅에서 성장기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 음악의 역사는 한국 땅에서 한국인이 향유했던 음악 현상의 변천사이다. 여기에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 음악도 있고, 서양 음악이라고 통칭되는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음악도 있다. 이 음악은 음악의 실체인 동시에 현상이기도 하다. 서양 음악은 금세기초 이 땅에 상륙하여 현대 한국인이 향유하는 음악의 실체이며 현상의 한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서양 음악이 짧은 시간 동안 확산되고 자리잡게 되었던 것은 음악에 대한 열망을 가졌어도 사회적 인식 부족, 낮은 지위와 처우로 인해 전문적 행위에 몸을 투여할 수 없었던 반면 이 열망이 신문화를 선망하고 수용하려는 역동성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음악을 향유할지라도 직업 음악인이 될 수 없다는 유교적 사유가 국악에는 통용되었지만 신문화의 하나인 서양음악에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지식인들의 의식이 바탕이 되었으며, 따라서 소규모 가내도제교육에만 의존했던 국악 교육에 비해 학교 집단 교육에 의한 서양 음악 교육의 양적 수확은 매우 큰 것이었다. 게다가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음악인들이 학교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 했으므로 서양 음악 교육은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서 국악을 앞지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교육 방법의 차이에서 20세기 전반기의 근대 한국 음악 문화는 국악의 정체와 서양 음악의 성장을 가름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 음악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와 같이 끊어질 듯 끊기지 않고, 없어질 듯 회생한 것 같이 중국의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원나라의 음악과 저 멀리 중앙 아시아의 음악을 받아들여 한국 음악화하여 우리 문화를 건강하고 풍요하게 했던 민족의 힘과 역사적 강인성이 줄기차게 약동할 것이다.

 

 

 

 

 

 

 

 [출처 : KBS관현악단출신모임 http://cafe.daum.net/kbspopsob, 풍류마을 http://www.kmusic.org/main.ph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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